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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자야, 사랑과 이별의 긴 숨바꼭질 (20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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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과 자야, 사랑과 이별의 긴 숨바꼭질 (2010)

퇴턍규 2016. 2. 22. 15:42

※ 출처 : 월간중앙, 201012호 (2010.12.01)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86288 




이상국의 미인별곡 | 백석과 자야, 사랑과 이별의 긴 숨바꼭질

1000억이 백석 詩 한 줄만 못 해 50년 골초의 니코틴보다 그리워







올 3월 법정스님이 입적했을 때 서울시 성북동의 길상사 스토리가 다시 화제가 됐다. 이 절이 있던 자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요정으로 주인이던 김영한(金英韓, 異名 김진향, 김자야 1916~1999) 여사가 1997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사찰을 세우게 됐다.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는 2만4000㎡(7000평)의 땅(40여 동의 건물포함)이었는데 김 여사는 스님의 수필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이 같은 기부를 했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이 여인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었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사찰명을 길상사로 했다. 김 여사가 부각되면서, 그녀와 시인 백석(白石·1912~1963?)의 순애보도 다시 조명되었다.

그녀는 1939년 그러니까 무려 58년 전(1997년을 기준으로)에 헤어진 애인을 여전히 가슴 절절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한 남자에 대한 순정과 열정을 이토록 고스란히 지닌 채 살아왔을까? 대원각 요정을 기증한 이후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에게 한 김영한 여사의 대답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000억대 재산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데 때가 있나?”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 해.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시를 쓸 거야.”

1987년 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解禁) 조치 이후 시인 이동순(李東洵·영남대) 교수는 9월에 <백석 시전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그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낮고 조심스러운 음성의 할머니였다. 그는 처녀 시절 백석과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교수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 여인을 만났다. 그녀가 김영한 여사였다. 김 여사는 이 교수에게 자신을, 백석이 붙여준 이름인 ‘자야(子野)’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천천히 오래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여인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아껴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질책이라고 했다. 이제 두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김영한은 어떤 여인이었던가.

그녀는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1남4녀 중 셋째 딸)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영한의 형제자매는 차례로 중학교까지 다 다녀서 동네에서 개화가정으로 소문이 났다. 1932년 할머니의 친척인 탄광업자가 인감도장과 집문서를 위조해 은행에 재산을 저당 잡히고 돈을 뽑아갔다. 이 업자가 사업에 실패하자 차압이 들어왔고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더 이상 학교 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고, 32세인 어머니가 바느질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 무렵 김영한이 결혼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15세(혹은 16세)인 그녀는 거의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갔으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는 중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해 김영한은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그녀의 자서전(<내 사랑 백석>)에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모인 정수경(鄭秀璟)과 함께 자신이 만주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에서 김영한은 일본인만이 다니는 학교인 ‘안동고녀’에서 학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모가 아들을 낳자 자신은 ‘아이보게(육아)’를 도맡아야 했고 이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기생이 된 것은 둘째 언니의 소학교 동창인 김수정(金水晶)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면서부터였다. 김수정은 기생으로 가무의 일인자가 되어 있었는데 김영한은 그것이 몹시 부러웠다. 수정은 다옥동(茶屋洞)의 큰 집에 화려한 세간을 차려놓고 심부름 아이를 두고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기까지 하지 않는가. 김영한은 어머니의 꾸중이 두려워 몰래 집을 나와 수정과 함께 조선권번(券番)으로 갔다. 당시 조선권번은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1867~1960)이라는 고전 궁중아악과 가무의 대가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규일의 네 번째 양녀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는 동기(童妓)가 됐다. 그녀는 양아버지 스승으로부터 진향(眞香)이라는 예명을 받았다. 참으로 맑은 물은 향기가 없다는, 진수무향(眞水無香)의 준말로 잡스러운 냄새를 풍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했다. 김영한(이하 진향)은 예능에 솜씨가 뛰어났다. 전통 궁중가무를 연수하는 3년간 줄곧 으뜸 성적을 받았고 수료식에서는 무산향(舞山香)과 검무(劍舞)는 물론이고 고난도의 ‘춘앵전(春鶯囀)’을 독무로 추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춘앵전은 자태와 용모가 8할 이상을 차지하는 춤으로 천품으로 타고나야 제대로 출 수 있다고 한다. 가곡과 무용을 제대로 배운 이에게는 ‘채맞은 기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진향은 그녀의 스승 하규일로부터 ‘채맞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석과 첫 만남
1933년 중·일 간 충돌이 벌어지면서 일제의 압박이 거세졌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분노를 느끼면서 신문지에 먹으로 가갸거겨를 또박또박 썼고 우리 시조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기생이 조선어 글씨를 쓴다는 소문이 나자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달려와 지켜보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해관(海觀) 신윤국(申允局)도 있었다. 그는 신윤국의 제의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1935년, 그녀 나이 20세 때였다. 도쿄의 문화학원 3학년에 편입을 신청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그녀가 성적이 우수한 것을 보고는 하와이로 유학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듬해인 1936년 가을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신윤국도 함경남도 홍원의 형무소에 수감됐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녀는 만사를 제쳐놓고 귀국해 함경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사상범인 그들을 면회할 수도 없었다. 진향은 기생의 복색을 갖춰 함흥권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생을 뒤흔드는 남자를 만나게 됐다.

함흥권번에 소속되어 그곳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간 바로 첫날, 함흥 영생고보의 교사 송별회에서 영어교사인 백석과 한자리에 앉게 됐다.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이렇게 전한다. “당신은 첫 대면인 나에게 대뜸 자기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하였다. 그러곤 당신이 마신 술잔을 꼭 나에게만 건네는 것이었다. 말없이 연거푸 기울이는 술잔에 용기를 얻은 당신은 덥석 나의 손목을 잡았다. 꽉 잡힌 내 손목에는 이미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내 사랑 백석>) 

그런데 불쑥 백석은 진향에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고 ‘마누라’라니…. 그리고 죽기 전에 이별이 없다니…. 이 말에 진향은 어쩔 줄 몰랐지만 가슴속으로 차오르는 행복감에 깊이 떨었다고 고백한다. 이날 그는 취기에 젖어 느슨히 풀린 육중한 몸을 그녀에게 기대며 이렇게도 말했다.“오늘부터 마누라 뜻대로 내 몸을 맡아주어야 해요.” 백석은 26세였고 진향은 22세였다. 이제 백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좀 돌아가보자. 

백석(白石 혹은 白奭)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어머니 이봉우(李鳳宇)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김영한은 집에서 보내오는 편지 겉봉에 기행이란 이름 대신 기연(基衍)이란 이름을 쓰는 것을 보았다고 술회했다.) 아버지는 조선일보에서 사진부장을 했으며 퇴직한 뒤에는 정주에서 하숙을 치며 살았다. 이 하숙집에서 하숙을 한 사람 중에는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도 있었다. 그는 정주에 있는 오산소학교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오산학교는 정주 출신의 상인이던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1864~1930)이 세운 학교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활동의 중심지였다. 백석이 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었다.

오산학교 졸업생은 대부분 서울이나 일본의 대학에 진학했는데, 백석은 가난 때문에 1년간 집에 머물렀다. 이 기간 그는 문학에 정진해 1930년 조선일보 제2회 신춘문예(당시는 신년현상문예라 불렸다) 공모에서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작품으로 소설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백석은 정주에서 금광으로 큰 돈을 모은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1883~1950,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를 사들여 사주가 되었다)가 지원해준 장학금으로 1930년(19세)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된다. 백석은 1931년 청산학원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영어를 전공했는데 일본어·러시아어·독일어·프랑스어도 상당히 잘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1934년 귀국해 조선일보사에서 교정부 기자로, 잡지 <여성>에서 편집기자로 일한다. 

신문사 생활을 시작한 뒤 1년간 그는 산문을 주로 발표하다가 1935년 8월 31일 <정주성(定州城)>이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했다. 이듬해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 당시 이 책의 정가는 2원이었는데 이렇게 비싼 시집은 처음이었다고 한다.그런데 1936년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자리를 옮긴다. 영생고보는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영생학교에서 시작한 학교다. 25세의 백석이 왜 조선일보와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갔는지는 불분명하다. 1936년 2월 조선일보에 <편지>라는 제목으로 그는 산문 하나를 싣는다. 당시 일련의 정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했습니다. 머리는 까맣고 눈이 크고 코도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했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았습니다.” 

이 낡은 항구의 처녀는 경남 통영 출신의 박경련(1918~?, 백석은 이 여인을 ‘란(蘭)’이라고 불렀다)이다. 1935년 6월 소설가 친구인 허준의 결혼식에 간 백석은 피로연에서 조선일보 기자이자 친구인 신현중(愼弦重·1910~1980)의 소개로 당시 18세인 이화고녀생 박경련을 만났다. 까만 머리, 큰 눈, 높은 코, 깊이 패인 목선, 호리낭창한 키. 아름다운 여인을 본 시인은 첫눈에 반했다. 허준이 처가인 통영으로 신행을 떠날 때, 백석은 신현중과 함께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녀의 집 명정 396번지에 그녀는 없었다. 

백석은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을 듯한” 심정이라며 시 <통영>을 썼다. 1936년 1월 초순 백석은 신현중을 채근해 다시 통영으로 달려갔다. 겨울방학이라 그곳에 내려간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서울로 올라가고 없었다. 허탈하게 귀경한 백석은 1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시 <통영2>를 발표했다. 두 달 뒤인 3월에 백석은 다시 통영으로 갔다. 조선일보에 사표를 낸 그는 함흥으로 떠나기 전에 이 여인을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경련의 사촌오빠를 통해 알아보았으나 이번에도 그녀는 집에 없었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기생 진향을 만난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한 여인에게 이미 마음이 팔려 속을 절절 끓이고 있었을 무렵, 그는 진향을 만나 첫 자리에서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라고 말을 한 것이다. 22세 여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그 한마디, 그녀의 인생을 바꾼 그 한마디는 사내가 그저 즉흥적으로 뱉은 낭만적인 표현일 뿐이었을까? 사랑을 이루지 못해 외로웠던 시인이, 문득 지음(知音)을 발견한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깊이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기 때문일까? 여하튼 정상적인 맥락으로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거나 아니면 진향에게 보인 애정의 표현은 단지 현실적으로 위안을 받기 위해 꾸며낸 태도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향은 백석이 자신을 사랑한 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촉망받는 시인이었던 이 남자가 자신에게 서슴없이 말해 준 그 ‘마누라’라는 호칭은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감동이고 영광이었다.

아호 ‘자야’ 지어줘
그 해 늦가을 두 사람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하숙을 정했다. 진향은 함흥 반룡산 기슭에 숙소를 정했고, 백석은 중리라는 곳에 있는 학부형 집에서 하숙을 했다. 시인은 학교의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진향의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함흥 거리의 사진관 앞을 지나면서 진열장 속에 걸린 여자의 사진을 외면하는 백석에게 진향이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아예 눈도 주기 싫어.” 우리는 백석의 전후 상황을 이미 알게 된지라 일견 가소롭기도 하지만 당시 진향에게는 더없이 충직한 사랑의 화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느 날 책방에서 진향이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제목이 붙은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사 왔다. 백석은 그 책을 펼쳐 이백의 시를 읽더니 진향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시 속의 자야는 중국 동진(東晋)의 여인으로 변방에 병역을 위해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애를 태운다. ‘자야’라는 이름은 진향의 삶에도 비슷한 숙명을 드리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영생고보 시절의 백석에 대해서는 당시 제자들의 증언이 있다.

“1936년 봄, 어느 오후 시간이었다고 기억된다. … 2층 창가에서 운동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양복 차림의 ‘모던 보이’가 교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일본식 용어로 ‘료마에’라고 하는 두 줄의 단추가 가지런히 반짝이는 곤색 양복이었다. 모발은 모두 뒤로 넘어가도록 빗어 올린 올백형에다 유난히 광택이 나는 가죽구두는 유행의 첨단을 망라한 세련된 멋쟁이의 모습이었다.”(김희모, ‘내 고보시절의 은사 백석선생’, 월간 <현대시> 1990년 5월) “백석 선생은 함흥에 있는 고의국(高醫局, 고약국)이란 약방에 잠시 하숙하고 있었다. 저녁 같은 때 백석 선생이 술을 마시고 사랑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곡에 따라 노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히도노 기모 시라나이데’. 이 곡은 원래 프랑스 샹송곡인데 일본인이 번역해서 부른 곡으로 ‘남의 속도 모르고’라는 가사의 노래였다.” (이현원의 회고, 1938년 당시 5학년 학생) 백석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현원의 기억은 묘한 감회를 부른다. ‘남의 속도 모르고’라는 저 가사는 이 시기의 백석을 표현하는 키워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을 때 자야는 흥남부두를 함께 여행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백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울 아버지가 방학이 시작되는 대로 곧장 올라오라는 편지가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밤 11시 함흥역으로 배웅을 나갔다. 너무나 추운 날이었기에 기차가 오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흔들고 역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백석이 기차에서 내려 따라왔다. 깜짝 놀라서 자야가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당신이 혼자 종종걸음으로 달아나는 걸 보니 마음이 쓸쓸해져서 내일 떠나기로 했다”고 말한다. 백석은 떠난 뒤 날마다 편지를 보냈다. 그러다가 한동안 편지가 뚝 끊어졌다. 자야는 밥을 먹어도 식불감(食不甘), 잠자리에 들어도 침불안(寢不安)에 몸져 누웠다.

백석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마음에 깊이 두고 있었던 다른 여자와 결혼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 온 백석은 친구 허준에게 도움을 청해 그와 함께 통영으로 청혼을 하러 갔다. 이화고녀를 졸업한 경련은 고향집에 내려가 있었다. 서울에서 통영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삼랑진행 완행열차를 타고 7시간 이상을 가서 구마산행 시골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다시 통통배로 통영에 닿으면 거기에서부터 명정까지는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백석은 갓을 쓰고 술을 받아 들고 댕기 한 감을 끊어서 박경련의 어머니를 찾아 청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민족 지사 집안의 여인인 모친은 가난한 시인이며 영어교사였던 백석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기생과 사귀고 있는 사실이나 그가 결혼한 경력이 있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무참하게도 그는 청혼을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자야에게 보내던 편지가 뚝 끊어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백석은 다른 사연을 털어놓았다. 자야가 쓴 <내 사랑 백석>에 쓰인 그의 고백. 부모가 강요하는 바람에 장가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색시 얼굴도 안 봤어. 당신 내 성질 알잖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백석은 <여성> 신간호(2권 10호)에 실린 시 한 편을 자야에게 보여줬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생각하고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통영 바다에서 썼을 이 시는 자야에 대해 돌이키는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좌절당한 박경련과의 사랑에 대한 진한 미련이었을까? 넘나드는 심사를 종잡기 어렵다. 이후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의 신경(新京·장춘)으로 함께 떠나자고 제의한다. 1937년 4월 꽃샘바람이 불던 시절이었다. 이 무렵 백석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자신에게 경련을 소개시켜준 절친한 벗 신현중이 약혼녀와 파혼하고 경련과 결혼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신현중의 누나인 신순정이 통영에서 박경련의 가정교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경련이 포천에 있는 신순정의 집으로 자주 놀러 갔다. 아마도 이때 신현중은 그녀를 보면서 몰래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자신은 약혼녀가 있어서 마음을 접고 친구에게 소개해주었으나 그 일이 여의치 않자 마음을 바꿔 먹은 것 같다.(신현중은 항일학생운동을 했던 독립지사로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부분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
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백석 시의 이 대목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는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불쑥 만주로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 일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은 자야의 생각은 복잡했다. 그녀는 고민을 하다가 백석의 앞길을 험난하게 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 몰래 서울로 와버렸다. 청진동에 숨어 살고 있는 3개월쯤 뒤에 백석의 친필 메모를 든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그리고 백석이 나타나서 하룻밤을 지내고는 부랴부랴 함흥 천리 길을 돌아갔다. 가면서 남긴 누런 미농지 봉투에 친필로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들어 있었다. 이 시를 읽고 자야는 다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이로부터 20일이 지난 1938년 6월 어느 날 다시 백석이 불쑥 찾아왔다. 조선학생축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제2회 조선고등축구연맹전이 경성운동장에서 열리게 되어 경기에 참가하는 대표선수를 인솔하는 교사로 왔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서울시청 옆에 있는 금당여관에 투숙시키고 백석은 자야의 집으로 찾아왔다. 영생고보 학생들은 교사가 없는 밤에 거리를 쏘다니다가 풍기단속반에 걸렸다. 이런 사실이 본교에 통보되었고 백석은 징계에 회부됐다. 인근의 여자고보로 전근 발령이 났고 그는 사표를 내고 서울로 와버렸다. 그리고 청진동 뒷골목에 방 2개가 있는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면서 조선일보에 다시 입사했다. 

둘은 단성사에서 상영하는 영화 <전쟁과 평화>를 보러갔다. 자야는 스크린에 나오는 ‘나타샤’를 보고 기가 죽었다. 여배우 나타샤가 8등신에다 너무도 요염하고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야는 백석이 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에 그의 등뒤로 숨었다. 영화를 보고 온 뒤 백석이 그 까닭을 물었다. 자야가 심정을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여자들이란 쓸데없는 데 신경을 써서 남자의 마음을 단련시킨단 말이야”라고 말했다. 백석은 자야의 행동에 왜 긴장했을까? 1938년 백석은 당시 잡지 <삼천리>의 기자였던 최정희에게 사랑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2001년 유족들은 이때 보낸 백석의 편지를 <문학사상>에 공개했다. 

이때 백석은 최정희에게도 이 시를 보냈다고 한다. 그녀의 유족들은 ‘나타샤’가 최정희라고 주장했다. 시인 안도현과 도종환은 이제 대답할 수 없는 이 선배 시인에게 도대체 나타샤가 누구냐고 묻는 공개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자야는 키도 작고 곱지도 않은 자신에게 ‘나타샤’라고 말해준 것이 ‘황송스럽다’고 했지만 백석은 그녀보다 더 키가 크고 더 고운 여자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썼을 수도 있다는 점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영원한 이별
자야는 1938년 12월 24일을 기억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날이라고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에 신문사로 출근한 백석이 저녁에 돌아오지 않았다. 10여 일이 지난 뒤 중학교 영어교사인 친구가 찾아왔다. 백석이 두 번째 장가를 들었고 자야에게 면목이 서지 않아 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야로서는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이날 밤 늦게 백석이 들어왔다. 오자마자 전등불을 짤깍 꺼버렸다. 겸연쩍어서였을까? 어둠 속에서 가만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서럽고 한심해서 그녀는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그때 백석은 갑자기 질풍처럼 자야를 꼼짝도 못하게 쓰러뜨리고는 위에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말이야, 나.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이로써 두 사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영어 교사 친구가 다시 찾아와 백석의 집이 난가(亂家)가 됐다고 알려주었다.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다니… 여러 사람을 울리고 있다니….” 그녀는 명륜동 근처로 숨어버렸다. 한 달 뒤 몹시 추운 겨울밤, 백석이 어떻게 찾아냈는지 자야가 사는 집 안방 뒤창 담 너머에서 그녀를 불렀다. “자야, 자야!” “그 순간이었다. 삼수갑산이 바로 내일이라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잔뜩 도사리던 나는 일시에 간 곳이 없었다. 나는 버선발로 달려나갔다. 다만 내 혼이 맨발로 뛰쳐나간 것인가. 어느 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당신께 안기고 말았다.”

그 뒤로도 백석은 다시 한 번 장가를 더 간 모양이다. 세번째 결혼을 하고 온 뒤, 자야는 중국에서 온 친구를 따라 상해로 갔다. 그녀는 가는 길에 윤심덕처럼 바다로 뛰어내려 죽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행한 친구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한 달 보름 만에 그녀가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백석이 찾아왔다. 침묵이 흘렀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신경 가기로 결정했어.” 이 한마디에 자야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진작 떠나려고 했는데, 당신을 아니 만나보고, 나 혼자 갈 순 없었어.” 꼭 가야 하는 일이냐고 자야가 묻자 그는 대답했다. “편안히 등을 붙일 단 한칸의 방이 이 땅에는 없어요.” 자야는 자신이 더 이상 그의 부모님과 아내들 사이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단호한 마음이 되어 말했다. “정히 돌이킬 수 없는 발길이라면, 조용히 혼자 어디론가 떠나서 작품이나 많이 쓰세요.” 이 말에 백석은 노여운 얼굴이 되어 “어찌 그렇게 사람을 야멸차게 버릴 수가 있소? 참으로 말 다한 사람이로군”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지”라고 중얼거렸다. “정히 혼자 가라면 혼자 가지.” 잠시 후 자리에서 부리나케 일어선 백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백석은 신경에서 관청에 다니다가 갑작스럽게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바람에 사표를 냈다고 한다. 자야는 인편에 한복바지저고리와 검정 두루마기 한 벌을 지어서 그에게 보냈다. 백석은 그 옷을 즐겨 입었다. 1941년 그는 생계 유지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중국인 토지 소작인 생활까지 했다.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업무에 종사했지만 1944년 일제 징용을 피해 오지 광산으로 숨었다. 광복 직전 백석은 토머스 하디의 <테스>를 번역해 출판하기 위해 잠시 서울에 올라왔다. 그때 자야를 찾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는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인 정주로 갔다. 1946년 조만식의 요청으로 통역비서가 되어 평양의 조선민주당 일을 맡았다. 1947년 시 <적막강산>이 <신천지>에 발표됐고 1948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진다. 전쟁 때 북진한 국군에 의해 정주군수를 맡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믿기 어렵다. 이후 행적은 알기 어려우나 1961년까지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조선문학>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해왔다. 아동문학 연구와 러시아 작가의 작품 번역에 힘을 기울인 듯하다. 

자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1955년에 대원각을 인수했다. 그녀는 왜 백석을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느냐는 류시화 시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영 헤어질 줄 알았다면 따라 갔겠지. 잠깐인 줄 알았어요.” 자야는 이렇게 덧붙였다.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그리운 것이 그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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