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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나는 천재의 것이 좋다” 본문

[2] scrap

문정희, “나는 천재의 것이 좋다”

퇴턍규 2016. 2. 22. 15:24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애미의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았다한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어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자화상」 전문

 

 

예술에 관한 한 나는 천재의 것이 좋다.

격렬한 피와 생명과 절규로 온몸이 떨리는 그런 작품이 좋다.

바람과 광기와 유랑의 언어로 들끓는 미당의 「자화상」을 읽으면 문득 시퍼런 독가시에 찔린 듯 전신으로 감동이 밀려온다. 홀로 목젖을 떨며 조금 울게 된다.

23세 천부의 젊음이 가쁜 호흡으로 쏟아놓은 이 시는 한국시사에 눈부신 비늘을 번뜩이며 영원히 황홀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첫 구절 애비는 종이었다를 두고 그가 이 시를 쓴 시대가 식민지 시대였다거나, 혹은 그의 부친이 어느 집의 마름이었다는 등의 개인사를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상처와 죄의식과 종의 자식이 아닌 자가 있으랴. 우리가 진정 사랑이라면 우리가 진정 인간이라면 우리는 모두 슬픈 굴욕과 유랑의 혼과 육신을 지니고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의 생애를 지배하는 바람의 숙명, 아니 모든 인간의 생애에 도사리고 있는 방황과 처절한 고난의 숙명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도 요절의 징후가 농후한 시인이었으면서도 그의 뜨거운 피를 잘 다스려 장엄한 문학의 산맥을 완성시킨 미당은 이 시 속에다 기막힌 단서 하나를 떨구어놓은 것도 보게 된다.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 섞인 몇 방울의 피가 그것이다.

미당 시의 도정은 바람과 광기와 유랑 속에 헐떡이는 이 피를 「귀촉도」의 눈물로 승화해하고,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장독에 떠놓은 정화수로, 혹은 「동천」의 즈믄 밤의 맑은 꿈으로 씻어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결국 「질마재신화」에서 우리는 소망(오줌을 받는 거름 항아리)에 별이 뜨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몸속의 피와, 가장 마지막 물인 오줌을 다시 생명을 기르는 거름으로 쓰기 위해 모으는 소망에 하늘의 가장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별이 뜨는 것이 미당 시의 만다라이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23세 미당은 이 시에서 이미 유언까지를 끝내고 있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어리며 살아가는 자학적 실존, 슬픈 생명의 원초성을 비범한 통찰과 두려울 만큼 거침없는 숙명의 언어로 쏟아놓은 미당의 시 「자화상」은 이 작품 한 편만으로도 그를 한국 시의 제일 높은 자리에 서슴없이 앉힐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꺼이꺼이 목이 메고 불처럼 다시 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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